고구려 전성기 때의 영토이다.아래 기사에서 보여주듯이 고구려의 강성함을 나타내려
영토를 과장해서 표기했다.
얼마나 위대한 제국인가.지금 남북한의 1.5배나 되는 영토를 가지고 있었으니...
지금의 일본 영토와 견줄 만한 대제국을 건설한 고구려는 우리 민족의 자랑거리이다.
이 시기에 글을 쓸 줄 알았던 사람도 백 명은 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여기저기 잘 파헤쳐 보면 고구려인이 쓴 비문이나 목간 쪼가리라도 발견할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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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한' 5세기 고구려 강역지도> 고구려연구재단ㆍ국사교과서의 경우
(서울=연합뉴스) 김태식 기자 고구려연구재단(이사장 김정배) 홈페이지(www.koguryo.re.kr) 중 '역사문화관', 이 중에서도 '고구려'의 '지도' 항목에는 시대별 고구려 강역지도 넉 장이 제공되고 있다.
기원전 37년 고주몽의 고구려 건국 당시 지도를 필두로 ▲3세기 전반 고구려 ▲5세기 고구려 ▲7세기 고구려의 강역지도가 각각 그것이다.
이 중 특히 논란거리가 될 수 있는 게 '5세기 고구려'라는 제목이 달린 세 번째 지도. 지도에 의하면 5세기 고구려 남쪽 영역은 서쪽의 아산만에서 시작해 동쪽 영덕 부근에 이르는 지역까지 한반도를 동서로 가른 선까지 미치고 있다.
이를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5세기에 고구려는 경기ㆍ강원 전 지역은 물론이고 소백산맥을 넘어 경상도 북부지역까지 지배하고 있었던 셈이 된다.
이와 똑같은 지도는 제7차 교육과정에 의한 교육인적자원부 발간 현행 고교국사교과서(54쪽)에도 보인다. 국사교과서의 지도는 '5세기 고구려 전성기기의 세력 판도'라고 해서, 마치 5세기 내내 한반도 중남부 일대가 온통 고구려 영역이었던 것처럼 묘사하는 고구려연구재단 지도와 미세한 차이가 있다.
이 지도가 왜 '이상'한가? 그 시기가 5세기 내내 100년 동안이건, 혹은 5세기 어느 무렵 '고구려 전성기'건 관계 없이 이 시기 고구려 영역이 이만했다는 증거가 어디에도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와 같은 '5세기 (전성기) 고구려 강역지도'는 서기 475년, 고구려 3만 대군이 당시 백제도읍 한성(서울 일대)을 함락함과 동시에 아산만-영덕으로 연결되는 동서 라인까지 치고 내려와 점령 통치를 했다는 '믿음'에 뿌리를 두고 있다.
하지만 '믿음'이 곧 역사적 사실을 확정해 주지 않는다.
근거가 무엇이건 이런 믿음은 삼국사기 지리지에 아산만-영덕 이북 일대가 한 때 고구려 영역이었음을 보여주는 흔적이 보이고 있고, 마침 1979년 4월에 충북 충주에서 발견된 '중원고구려비'와 결합해 역사적 사실처럼 굳어지게 됐다.
하지만 이들 지도가 말하는 '5세기 고구려 강역지도'는 근거가 없다.
첫째, 아산만-영덕을 연결하는 동서축 이북이 옛 고구려 영역이었다는 흔적이 삼국사기 지리지에 보인다고 해서 그것이 5세기대 고구려 강역이라는 증거는 아니다.
둘째, 중원고구려비가 지금의 충주 일대를 고구려가 한 때(혹은 한동안) 지배하고 있었음을 보이는 증거이기는 하지만, 이것이 5세기대 고구려 유물이라는 증거는 없다. 비문은 마멸이 심해 언제 작성됐는지 알 수조차 없다.
반면 고구려연구재단과 국사교과서가 말하는 5세기대 고구려 강역 판도가 역사적 사실과 동떨어져 있다는 흔적은 여러 곳에서 발견된다.
특히 삼국사기는 곳곳에서 5세기에 백제와 신라가 황해도 남부와 한강유역, 적어도 원산만 일대까지 지배하고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475년 전쟁을 고비로 백제가 한강 유역 일대를 고구려에 빼앗겼다는 주장도 90년대 이후에는 근거없는 것으로 드러났다. 그러기는커녕 백제는 성왕 7년(529) 혈성(穴城)이란 곳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고구려에 패하기 전까지 한강유역은 물론이고 그 북쪽 황해도 남부 일대까지 줄곧 지배하고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그뿐 아니라 신라만 해도 5세기대에 이미 원산만 일대까지 지배하고 있었음이 삼국사기 곳곳에서 확인되고 있다.
예컨대 자비왕 11년(468)에는 고구려가 말갈과 함께 북쪽 변경 실직성(悉直城)을 습격했다고 하고 있다. 실직성은 지금의 삼척 혹은 강릉 일대로 이곳에 고구려가 침입했다 함은 이미 468년에 신라가 이곳을 통치하고 있었다는 증거이다.
또 소지왕 3년(481)에는 왕이 지금의 안변 일대인 비열성(比列城)에 거동해 군사들을 위로했다 하므로 신라는 이 무렵에 이곳까지 지배하고 있었다는 증거가 된다. 이 외에도 5세기가 종료되는 서기 500년 무렵까지 신라가 적어도 태백산맥 동쪽 영동지방은 확고하게 지배하고 있었다는 직ㆍ간접적 증거는 많다.
종래 학계에서는 신라가 함경도 일대까지 진출한 것이 진흥왕 때(재위 540-576)라고 하고, 그런 신라가 서울에서 너무 멀어 통치가 곤란했으므로 이내 이들 지역에 대한 통치를 포기했다고 주장하고 있으나 그 어떤 것도 근거가 없다.
삼국사기 기록을 존중할 때 오히려 신라는 늦어도 5세기 중반 무렵에는 적어도 평안도 일대, 아마도 함경도 일대까지 이미 진출해 있었다고 봐야 한다.
따라서 5세기대에 고구려가 아산만과 영덕을 연결하는 동서축까지 남하해 이들 지역을 점령하고 통치를 하고 있었다는 주장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이런 기록들은 모조리 '조작'이어야 하며, 더구나 그것이 '조작'이라는 증거가 뒷받침되어야 한다.
하지만 그런 흔적은 어디에도 없다.
동북공정에 맞서 고구려를 지키는 일이 증거도 뒷받침되는 않는 '믿음'을 동원해 그 영역을 마구잡이로 늘이는 것과 동의어는 아니다. '강성대국' 고구려를 만들기 위해 왜 애꿎은 백제를 좀 먹고 신라를 깎아 먹어야 하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