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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해공군 사령탑은 모두 서울에 있었다

우똘이 2010. 7. 9. 11:04

                     육해공군 사령탑은 모두 서울에 있었다

 

 

공군 사령탑을 찾아라 … 동작구 대방동 공군사령부

 

50년대 후반 전란 정비기와 60년대ㆍ70년대의 성장기 그리고 80년대 후반에 이르기까지 40년 가깝게 수도 서울 한강을 사이에 두고 북단에는 육군본부가, 서남단에는 해군과 공군본부가 튼튼히 자리매김하면서 북방 공산 이데올로기의 위협으로부터 국가안보 보루 역할을 수행했다는 사실을 아는가? 그 중에서도 서울 서남단의 보루였던 동작구와 영등포구 일원은 서울의 젓줄인 한강을 끼고 수도 서울이 확장되면서 엄청난 변모를 겪었고, 현재 동작구 대방동이 공군 사령부가 주둔해 있던 지역이라고 알 수 있는 상징물이라고는 근린의 주공 아파트, e-편한 아파트 뒷동산 산책로 정상에 남아있는 창공탑이 유일한 징표다.

이 지역에 머물고 있었던 우리 공군에 대한 기록을 잠깐 살펴보기로 한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의 수립 이후 조직된 국군은 미군으로부터 L-4 연락기 10대를 양도받아 육군 항공대를 설립하였고, 이를 기반으로 1949년 10월 1일 대한민국 공군이 창설된다. 당시 공군조종사들은 단 1회의 훈련 비행 훈련만으로 F-51전투기 10대를 주일미군으로부터 인수받았는데, 인수 1개월 만에 6.25가 터져 항공작전에 참가하게 된다. 이렇게 시작한 공군은 '일면 전투 일면 건설'의 기치 아래 휴전 당시까지 1개 전투비행단, 3개 전투비행대대 및 전폭기 79대를 포함한 총 110대의 항공기를 보유한 공군으로 성장하였으나, 작전지원 및 교육체계 등은 아직 미흡한 수준이었다. 이에 따라 공군은 공군본부 서울 이전(1956. 7.서울 대방동으로 이전)을 서둘렀으며 이밖에도 공군대학 창설, 항공기 수리창의 현대화 등 50년대 말까지 지원체계의 기반을 갖추는 데 노력을 경주하게 된다.

7~80년대에 경제재건 사업을 우선시하고 북한 위협의 가시거리를 멀리 한다는 국방 장기계획에 따라 계룡대 청주ㆍ진주로 육ㆍ공군의 사령부 이전(1989. 7. 공군본부 이전)이 추진되었다. 결국 이 고장은 사령부 지원부대만 남게 되고 사령부가 점유하고 있던 유휴공간은 아파트, 기숙사, 복지단 등으로 개발이 이루어져서 인근 주민과 시민들에게 많은 녹지공간과 생활공간을 자연스럽게 제공하게 된 것이다.

육군 사령탑을 찾아라 … 용산구 일대와 육군본부

서울역에서 한강철교에 이르는 신(新) 용산 지역은 조선시대까지만 해도 홍수피해가 잦아 낮은 지대는 인가가 없는 벌판이었다. 그러나 도심과 가깝고 한강 수운을 이용하면 인천과의 연결이 용이하며 평탄하고 넓다는 용산의 장점을 제일 먼저 알아본 것은 일제였다. 식민통치를 위해 일제가 이 지역을 군사기지로 이용하게 되면서 용산은 병영 주둔 지역으로서의 숙명을 안게 된다. 1888년 한강에 증기선이 운항되고, 1891년 우리나라 최초의 신학교이자 양옥건물인 용산신학교가 설립되었으며, 1900년 서계동~청파동~원효로4가에 이르는 전차가 개통되었다. 그리고 1905년 러일전쟁에 승리한 일제에 의해 군사기지와 철도기지가 세워지면서 이곳은 식민통치와 대륙침략의 거점이 되었다.

1945년 해방과 함께 일본군이 주둔했던 신 용산 지역에는 1948년 창군 이래 1989년까지 육군본부가 자리했다. 또한 자연스레 한국군과 미국군의 사령탑이 들어서게 되어 근 40년간을 사용하게 된다. 그러다 2006년 들어 미군기지의 이전과 더불어 민족공원 조성이 추진되고 있다. 육군본부 이전 자리에는 전쟁기념관이 조성되었고, 미군기지 자리에는 용산가족공원과 국립중앙박물관 등이 건립되었다. 초고층 아파트 건립으로 이 일대의 경관은 크게 변모되고 있다.

대한민국의 육군은 1945년 12월 5일, 서울에 설치된 군사영어학교에서 시작된다. 주한 미군정이 국방사령부 설치령을 발표하고 조선국방경비대 설립계획을 완료하면서 이에 필요한 군사인원을 교육할 목적으로 세운 교육기관이 군사영어학교다. 이 학교는 1946년 110명의 장교를 배출했는데, 이들이 초기 남조선국방경비대의 주역을 담당하였고, 이후 1946년 6월 15일 남조선국방경비대가 조선경비대로 개칭되고, 이어서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면서, 조선경비대는 오늘의 대한민국 육군으로 그 명칭이 바뀌었다.

대한민국의 육군은 6·25를 거치면서 10만에서 60만 대군으로 성장했고, 60년대 중반부터 70년대 초반까지 월남전에 참전하면서 정예군으로 단련되었으며, 그 후 70년대 중반부터 80년대를 거쳐 90년대에 와서는 꾸준히 군의 현대화 계획이행에 따라서 새로운 체제로 바뀌어 가고 있다.

해군 사령탑을 찾아라 … 영등포구 신길동 일대와 해군 본부

1945년 10월, 중국 상해 남경대학에서 항해학을 전공한 손원일을 비롯한 정긍모, 김영철, 한갑수, 석은태 등은 이 나라의 해양을 지키는 해군을 창설해보겠다는 의욕 하나만 가지고 「해안 경비대원 모집」벽보를 내걸고 뜻 있는 청년들을 규합하기에 이른다.

1945년 11월 11일, 국군 최초의 정통 조직 체제를 갖춘 해사대는 이렇게 창설된다. 지원자 200여 명 중에서 엄선한 80여 명은 일제 때의 철공조합원 양성소였던 안국동의 한식집에 차려진 수용시설에서 교육을 받게 되는데 이것이 최초의 해군 사관생도 교육이다. 이들의 교육기간은 70일로, 모든 경비는 일체 해사대 간부들이 부담하였는데 80여 명 장정들의 의식주를 해결하느라 적지 않은 고충을 겪었다고 한다. 결국 발족 1개월 만에 재정 궁핍으로 자체해산이 불가피해진 이들은 미 군정청 당국과의 수차에 걸친 협의 끝에 연안경비와 밀수방지 그리고 난파선구조 등을 임무로 하는 경비대 조직에 합의를 보게 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그 해 11월 11일 손원일과 동지 70여 명들은 감격적인 결단식을 거행하였다는 일화가 있다. 이렇게 대한민국 해군은 탄생되었다.

서울의 한식집 지붕 밑에서 웅크리고 있던 해사대는 일약 군항인 진해로 그 본부를 옮기게 되었으며, 해사대에서 교육받은 70여 명의 대원과 간부 6명이 곧 해군 창설의 기간요원이 되었다. 해안경비대가 발족함에 따라 1946년 9월 1일에는 미고문단이 설치되고 함정이 구입되는 등 기구는 대폭적으로 개편되고 확장되어 갔다. 그 뒤 해안경비대는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수립과 동시에 해군으로 발족하게 되었으며, 북한의 남침 직전까지 주로 연안경비와 수송지원임무를 수행하였다.

한국전쟁기(1950~1953)에 해군은 병력 및 물자의 현저한 열세에도 불구하고, 옥계해전과 대한해협 해전에서 승리하고 인천상륙작전 승전을 계기로 해서 한반도 전 해역의 제해권을 완전히 장악하게 되었으며, 이때부터 적극적인 공세를 펼쳐 나갈 수 있게 된다.

급기야 지금의 신길7동 가마산 일대에서 사령본부를 세우고 이웃에 공군 본부와 한강 건너 용산에 자리한 육군 사령탑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1993년 6월 17일 계룡대로 자리를 옮기는 날까지 이 나라 국토방위의 일익인 바다를 지키는 보루 역할을 해왔던 것이다.

지금은 3군의 사령탑이 계룡대로 옮겨가 있지만, 서울 신길7동 일대와 동작동 일대가 해방 이후 우리 국군 창군의 감격의 역사를 지닌 고장으로 기억되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이 지역에서 태어나서 성장한 서울 새내기들에게 알리고자 한다.